최봉설 투사의 옛집

(1면에서)

1908년에 반일투사들은 의연금을 모아 소학교를 지었고 1912년에는 중학부를 설치하고 창동학원이라 불렀답니다. 창동학원은 1933년까지 200여명 학생들을 졸업시켰답니다. 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민족문화를 전수하는 한편 반일계몽교육을 실시했답니다. 그리하여 후에 창동학원은 실제상 반일투사들을 양성하고 훈련하는 역할을 담당했답니다. 당시 학원에서는 군사과를 설치했는데 많는 졸업생들이 후에 왕청 라자구에 있는 사관학교에 가서 반일투쟁에 투신했답니다. 그중 최봉설, 림국정 등 반일투사들은 일제 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함으로써 와룡동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창동학원은 옛적에 2층으로 된 교사였다는데 기념비 건너 동쪽 펑퍼짐한 밭 가운데 있었답니다. 헌데 지금은 옥수수밭과 과원으로 변하여 그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윤할아버지는 학생들에게 또 피에 젖은 ‘15만원 탈취 거사’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습니다.

1919년 룡정 ‘3.13’반일대집회는 일제의 잔혹한 무장탄압으로 끝나고 많은 투사들이 피못에 쓰러졌습니다. 집회자들은 그때 손에 무기를 잡지 못한 것을 통탄했습니다. 그중에는 창동학원 졸업생들인 최봉설, 림국정, 윤준희 등도 들어있었습니다.

1920년 초에 연변을 들썽했고 민간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진 ‘15만원 탈취 거사’가 바로 이렇게 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조선은행 회령지행 룡정촌장소 사원으로 근무하던 지하공작원 전홍섭한테서 일본놈들이 길회선부설경비로 회령에서 룡정으로 일본돈 15만원을 보낸다는 소식을 입수한 최봉설 등 6명은 습격계획을 짰습니다. 1920년 1월 4일, 이들은 룡정시 승지촌 동량리어구에서 끝내 일제은행권 15만원을 탈취했던 것입니다.

거사가 성공된 후 최봉설은 밤 사이에 80리 길을 달려 날샐녘에 와룡동에 도착했습니다. 헌데 낌새를 알아챈 일본놈들이 와룡동을 포위해왔습니다. 집이 겹겹이 포위된 정황하에서 최봉설 투사는 키 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은 후 단숨에 아홉고개를 넘어 적들의 손아귀를 벗어났습니다. 최봉설의 용맹한 모습에 기절한 적들은 풀이 죽어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뒤어어 학생들은 100년 력사를 기록한다는 최봉설 투사의 옛집을 찾았습니다. 이 집은 옛날 바깥 퇴마루가 없어졌을 뿐 집안팎 구조는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바로 이 집에서 최봉설 투사는 건너편 창동학원에 다니였고 ‘15만원 탈취 거사’의 주동자 림국정도 여기에 류숙하면서 창동학원에 다니였습니다.

민주소학교 학생들은 유서깊은 이 옛집 앞에서 뜻깊은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고향의 자랑스러운 력사에 매료된 학생들은 다시 한번 창동학원 원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민족문화를 전수하고 반일계몽활동을 진행하기 위하여 지은 창동학원의 교사를 짓기 위해 이 집에서 벽돌 한장, 저 집에서 기둥 하나,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여 지엇다는 창동학원입니다. 그 후 일본놈들이 학교를 점령하고 사령부까지 앉힌다는 정보를 받고 눈물을 휘뿌리며 학교에 불을 놓았다는 와룡동 촌민들과 투사들이였습니다.

비록 23년 전의 한차례의 답사였지만 그때의 그 정경이 한눈에 안겨오는 것 같았습니다. 답사를 끝마친 학생들이 귀로에 올라 부르는 교가도 귀가에 생생합니다.

창동의 하얀 마음 심어주면서

슬기로운 새 세대 키워가는 요람

글소리 노래소리 정다운 교정

아 길이 빛나라 민주소학교

중화의 앞날을 떨쳐나가리.

림철 기자